우크라이나는 과거 러시아와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
(2022년 3월 해외 논평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30년 이상 지속된 주권국가를 군사력으로 압살하려는 시도는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이쯤 되면 푸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의 논문 등에서 찾아보면서 1000년 이상 전의 역사를 풀어 보았습니다.
푸틴이 말하는 역사적 러시아, 민족 일체성이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021년 7월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체성에 대하여」라는 논문이 재차 주목받았습니다.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이나 역사적 러시아에 있어 형제라합니다.
"그 연원은 9세기에 일어난 키예프 대공국(~1240년)입니다ㅣ. 류리크 가문이 통할하는 국가로 동슬라브(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을 가리킴)에 의해 번성하다가 몽골제국에 멸망당한 왕조입니다."
류리크 왕조는 분할 상속되었기 때문에 해가 지날 때마다 국내에 여러 군주를 거느린 이중 지배적 경향을 보입니다. 현 러시아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모스크바 대공국도 그 중 하나입니다. 역시 몽골을 따랐다가 1480년 이반 3세가 사실상 독립하게 됩니다.
러시아 폴란드 전쟁의 결과는
그 무렵, 현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이 폴란드(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에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1654년~67년의 러시아 폴란드 전쟁의 결과 러시아는 폴란드로부터 키예프와 현 우크라이나 동부를 얻습니다.
폴란드 분할 결과
'여제'로 유명한 예카첼리나 2세 황제(재위 1762~96년)는 1793년과 1795년 '폴란드 분할'에 관여해 현 우크라이나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다만 72년의 제1회 분할에서는 최서단의 리비우 등 갈리치아 지역을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크림 반도
남부 크림 반도 주변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몽골제국의 뒤를 이은 크림 판 국이 지배하다가 예카체리나의 치세 시에는 오스만제국의 보호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774년, 에카체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고 크림 판 국의 독립을 오스만이 인정하는 형태로 일대를 실질적으로 획득한 후 1983년 파병해 판국을 멸망시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단독 강화와 우크라이나 민족의식 고양
이후에도 러시아의 서남쪽으로 세력 확대는 지속되었지만 1917년 발발한 러시아 혁명이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혁명 정부는 싸우고 있던 독일, 오스트리아와 단독 강화.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잃습니다. 게다가 독일 패전으로 막을 내린 후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할 이후 러시아 등에 살고 있던 폴란드가 정식 부활합니다. 패전국 오스트리아로부터 갈리치아 지역 등이 할양된 것입니다.
이 혼란기에 우크라이나의 민족의식은 고양되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습니다. 독일과 그 이름으로 강화하여 대 러시아전의 원군으로 부탁해도 나중에 반목합니다. 더욱이 독일이 항복하고, 러시아 적군에 석권되어 공산계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건국'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이름의 나라가 러시아 등 4개국에서 22년에 결성한 것이 소련이었습니다.
문두의 푸틴 논문은 이 경위를 '우리의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 러시아로 한 몸이었는데, 그것을 해치는 형태로 소련이 형성되었다고요. 이러한 인식은 소련 붕괴의 경위를 맞추어 생각하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이 떠오릅니다. 붕괴는 실질적으로 1991년 말 벨로베이시 합의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결성에 종사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원동맹국이 그 의사를 잃어버렸다를 확인했다는 것이니까. 결성의 경위에 의의를 나타내는 푸틴 논문은 당연히 이 논리도 부정하지 않으면 이상합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위기, 세계 경제에 심각한 영향 (IMF 성명)
러시아는 갈리치아 지역도 손아귀에
1939년 소련은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습니다. 같은 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후에 밝혀진 비밀의정서에서 폴란드가 소유한 갈리치아 등의 탈환을 약속하는 밀약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 자체는 41년에 히틀러가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독소전이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소련은 미영 등과 연합국 공동선언에 조인하여 정식 '추축국 적인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독일 함락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군하는 대의명분을 얻었으므로 불가침조약에서 독소전까지의 책임을 사실상 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갈리치아 지역도 손에 넣으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판도가 거의 확립되었습니다. 소련은 1차대전 강화로 상실한 지역을 탈환했습니다.
평가이 엇갈리는 후메리니츠키의 결단
크림의 역사도 논문이 강조하는 두 민족의 일체성과 크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몽골제국의 지배하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제국이 자랑하는 기마전술에 대항하는 동안 스스로도 기량을 익혀 '코사크'라고 불리는 무장 기마대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지배자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으로 바뀌어 반감을 증폭시킨 코사크의 리더 후메리니츠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결과적으로 자기 편이라고 부탁한 곳이 러시아였습니다.
후메리니츠키가 1654년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앞서 언급한 '러시아-폴란드 전쟁'입니다. 러시아 사관은 이 사건을 키예프 대공국 이래의 재결합으로 간주하는 반면, 우크라이나 사관은 일시적인 맹약에 지나지 않는다며 부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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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 영토로 바뀐 경위
경사라고 칭하는 쪽에 있던 것이 소련의 유력 지도자로 후에 톱이 되는 흐루시초프였습니다. 소련의 겉모습은 '구성하는 15공화국이 대등'하기 때문에 최대의 러시아가 아닌 다른 출신이라고 강조하면 출세에 유리하다는 기묘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역대 최고 지도자도 스탈린은 그루지야 출신, 브레지네프도 우크라이나 대학을 나와 취업한 사람이 팔자입니다. 브레지네프는 몰도바에도 지연이 있어서 그 인맥에서 체르넨코를 배출했습니다. 흐루쇼프 역시 우크라이나와의 인연을 강조한 인물입니다.
1954년 스탈린 사후 소련 공산당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있던 흐루쇼프 당시 당 제1서기가 흐메리니츠키와의 맹약 300년을 기념해 크림반로를 우크라이나령으로 변경해 버렸습니다. 고향에 은혜를 베풀어 두려는 속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역사적 경위가 북부와 다른 크림 주민(러시아계가 많다)은 소련 시대부터 불만을 더해갔고, 연방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했을 때는 「그렇다면 크림도 독립이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끓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그곳에서 논의하고 러시아는 크림은 우크라이나령으로 인정합니다. 크림 반도는 국가와 거의 동등한 권한(의회나 정부의 설치 등)을 가진 자치공화국과 우크라이나 헌법이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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